말그대로 미니멀리즘을 극대화한 아이폰 같은 인테리어의 3평 남짓한 소중한 공간에 북유럽풍 의자와 테이블 몇개만을 배치한다. 사각사각하며 유리창에는 벌써 스텐실로 제법 그럴듯한 스토리를 가진 가게 이름도 붙였다.
돈 벌려고 하는 일이 아니다라는 인상.
나는 나의 자아를 실현하기 위해서, 남는 시간을 나에게 쏟아붇기 위해서 가게를 합니다.
보사노바 풍의 작은 노래를 틀어 두고, 혼자 고양이를 만지작대며 회사다니는 또래 지인들을 기다린다.
돈벌려고 하는 일이 아니라면서 블로그에 스토리를 만들어낸다.
먹거리를 위해 소규모지만 원산지를 일일이 따져가며 재료를 고른다. 먹거리 엑스 파일에 이영돈이 덮쳐 착한 가게 타이틀을 얻으면 좋겠다.
돈 벌려고 하는 일이 아니다. 최소한의 돈만 벌고, 남는 자기 시간에 책을 본다, 기타를 배운다, 수영을 한다. 홍대 대로변에는 비싸서 골목 안쪽으로 들어가잔다. 뜨내기 손님보다는 단골 장사다.
안쪽으로 들어가도 정성들여 만든 팥빙수는 블로그만 잘하면 애들이 찾아온단다.
팥은 직접 쑤자고 한다. 그래야 수제 타이틀을 붙일 수 가 있단다. 제대로 음식도 못하는 아이들이 앙금을 만들다가, 팥죽을 쑤어다가 길에 버린다. 그래 이것도 과정이야 하며 지치지 않고 열심히 노력해서 맛은 조금씩 나아진다. 팥죽을 버리다가 주위를 둘러보니 한달새에 같은 골목에 비슷한 집이 벌써 2개나 생겼다. 개중에는 영특하게 장사를 잘 하는 집도 있다. 매스컴도 타고 블로거지들도 많이 다녀가서 그런지 토요일 점심만 되면 새로 뽑은 홍대생 알바가 밝은 얼굴로 대기표를 나눠준다. 손님들의 편안한 자리를 위해 테이블 수를 늘리지 않는것이 전략인가라고 가게 안을 들여다보지만 꽉 들어찬 손님만 눈에 들어온다. 어느새 옆에는 신규 골목 자아실현 희망자중 몇몇이 기린처럼 목을 빼고 가게 전략 분석중이다.
날리는 파리를 쫓으며 그를 선망의 대상으로 바라보고 연구한다.
너댓살 정도 어려보이는 한 남자가 한쪽 어깨에는 기타를 매고 필름 카메라를 들어 여자친구를 찍어주다가 눈이 마주치자 호객행위라도 하듯 웃어 보이지만 금새 지나쳐가버린다.
페이스북 타임라인에는 이름도 처음들어보는 강사가 하루에도 몇번이고 나타나 허겁지겁 올라탄 지하철의 나의 안일함을 꾸짖었다. 도전이라는 것, 성공이라는 것에 무슨 법칙이라도 있는양, 젊은이들의 꾸준함을 비웃었다.
내일 당장 출근해야하는 월요병에 걸린 아이들은 이때다 하는 마음으로 페이스북 강사의 듣기 좋은 말을, 긍정과 희망으로 가득한 부추김을 듣고 손에 쥔 모든 것을 던져버린 뒤 거리로 뛰쳐나왔다.
여러분, 지금 미래를 걱정만 하고 앉아있으면 결국 획기적인 변화는 없습니다!
지금 당장! 하고 싶은 일을 찾아 나서세요!
별일 없이, 할수 없이 매일 같은곳에서 같은일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 자신에게 남아있는 것을 뒤돌아보게 했다.
인생의 잔고가 바닥일 수 밖에 없는 아이들은 뭔가 잘못 되었다며 우루루 나와서 기존의 법칙들을 깨부수는 것을 팬시했다. 정해진 길이라는 느낌이 조금이라도 들면 치를 떨며 혐오하면서 어떻게든 남들과는 다르게 남들보다 빠르게 튀는 또다른 레이스에 뛰어들었다.
그들의 자아실현은 애초에 자신이 있는 공간에서의 '탈출'이었지 어떤 곳의 '지향'이 아니었다.
유명세로 책까지 낸 '청춘 강사'는 젊음이라는 타이틀의 가벼운 무게를 이용하라 했다.
지금은 나름 가벼워서 쉽게 엉덩이를 떼고 나아갈 수 있다며 책을 팔아댄다. 이제는 공중파에 출연한 강사의 말을 들으며 귀 얇은 신혼 서방 하나는 부러운 눈빛으로 홍대의 젊은 사장님들을 바라보며 저녁식탁에서 마누라에게 지키지 못 할 공수표를 날려댄다.
'도전'이라는 아름다운 단어로 꾸며진 '자영업' '치킨집'을 차리고 '사업'이라 자부하던 은퇴한 대기업 부장들은 이제 '카페'를 꿈꾸는 아이들에게 자신의 파이를 조금 나눠줘야 할지도 모르겠다.
이 사람의 책은 희번뜩한 내용이 있다기 보다, 다른 책들, 음악들을 들어보고 싶게 만들기 때문에 자주 보게 되는 것 같다. 내가 제일 잘하는게 맛있게 먹는 사람 따라하기인데, 이 사람은 맛있게 살고 있는 듯한 모양새다. 그래서 맛집 따라가기 처럼 자연스럽게 인용된 많은 책과 음악을 들어 보게 된다. 아무튼 기억 할만한 내용은..
1.인생은 개인의 노력과 재능이라는 씨줄과, 시대의 흐름과 시대정신 그리고 운이라는 날줄이 합쳐서 직조됩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나의 의지와 노력과 재능이라는 씨줄만 놓고 미래를 기다립니다. 치고 들어오는 날줄의 모양새는 생각도 안하고 말입니다. 이 씨줄과 날줄의 비유는 박완서의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에서 힌트를 얻었습니다. 작가의 자전적 이야기인 이 책에 나온 '인생을 내 마음대로 계획하기에는 시대라는 날줄이 너무나 험했다'라는 문장을 읽고 맞는 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2. 그러니까 요즘처럼 날줄이 호락호락하지 않은 시절에는 이런 삶의 태도가 절실합니다. '급한 물에 떠내려가다 닿은 곳에 싹 틔우는 땅버들 씨앗, 그렇게 시작해보거라'라는 고은 시인의 시처럼 살아야 합니다.
3. 영화평론가 이동진 씨는 자신의 책 <밤은 책이다>에서 "하루하루는 성실하게 살고 싶고, 인생 전체는 되는 대로 살고 싶아"는 말을 했습니다. 이건 말 그대로 지혜입니다.
4. 살아있다는 그 단순한 놀라움과 존재한다는 그 황홀함에 취하여 - 김화영
5. <치명적 농담>
"스님 도를 닦고 있습니까?"
"닦고 있지."
"어떻게 하시는데요?"
"배고프면 먹고, 피곤하면 잔다."
"에이. 그거야 아무나 하는 것 아닙니까? 도 닦는 게 그런 거라면, 아무나 도를 닦고 있다고 하겠군요."
"그렇지 않아, 그들은 밥 먹을 때 밥은 안 먹고 이런저런 잡 생각을 하고 있고, 잠 잘 떄 잠은 안자고 이런 걱정에 시달리고 있지."
6. (가장 도끼로 내리찍은 파트, 이런게 있는지도 몰랐는데..)
(출처:http://blog.daum.net/elegant0302/1756)
보왕삼매론
몸에 병 없기를 바라지 말라.
몸에 병이 없으면 탐욕이 생기기 쉽나니, 그래서 성인이 말씀하시되 「병고로써 양약을 삼으라」하셨느니라.
세상살이에 곤란함이 없기를 바라지 말라.
세상살이에 곤란함이 없으면 업신여기는 마음과 사치한 마음이 생기나니, 그래서 성인이 말씀하시되「근심과 곤란으로써 세상을 살아가라」하셨느니라.
공부하는데 마음에 장애 없기를 바라지 말라.
마음에 장애가 없으면 배우는 것이 넘치게 되나니, 그래서 성인이 말씀하시되 「장애 속에서 해탈을 얻으라」하셨느니라.
수행하는데 마(魔)가 없기를 바라지 말라.
수행하는데 마가 없으면 서원이 굳건해지지 못하나니, 그래서 성인이 말씀하시되 「모든 마군으로서 수행을 도와주는 벗을 삼으라」하셨느니라.
일을 꾀하되 쉽게 되기를 바라지 말라.
일이 쉽게 되면 뜻을 경솔한데 두게되나니 , 그래서 성인이 말씀하시되 「여러 겁을 겪어서 일을 성취하라」하셨느니라.
친구를 사귀되 내가 이롭기를 바라지 말라.
내가 이롭고자 하면 의리를 상하게 되나니 그래서 성인이 말씀하시되 「순결로써 사귐을 길게 하라」하셨느니라.
남이 내 뜻대로 순종해주기를 바라지 말라.
남이 내 뜻대로 순종해주면 마음이 스스로 교만해지나니, 그래서 성인이 말씀하시되 「내 뜻에 맞지 않는 사람들로서 원림을 삼으라」하셨느니라.
공덕을 베풀려면 과보를 바라지 말라.
과보를 바라면 도모하는 뜻을 가지게 되나니, 그래서 성인이 말씀하시되「덕을 베푸는 것을 헌신처럼 버리라」하셨느니라.
이익을 분에 넘치게 바라지 말라.
이익이 분에 넘치면 어리석은 마음이 생기나니, 그래서 성인이 말씀하시되「적은 이익으로서 부자가 되라」하셨느니라.
억울함을 당해서 밝히려고 하지 말라.
억울함을 밝히면 원망하는 마음을 돕게 되나니, 그래서 성인이 말씀하시되「억울함을 당하는 것으로 수행하는 문을 삼으라」하셨느니라.
항상 나의 계획대로 되지 않을때마다 항상 필요이상으로 화가나고 짜증이 난다. 그리고 가만히 생각해보면, 내 계획대로 된 일이 몇 번 없다. 이 구절을 보고 나서 뒤통수로 머리를 맞은 느낌이었다. 오랜시간 곱씹어볼 내용이다.
예전에 영화 현장에서 일을 한적이 있다. 영화 현장의 막내는 항상 누군가와 함께 있다. 항상 심부름을 쉬지 않고 해야하기 때문에 혼자만의 시간을 가지기가 어려운 직업 중에 하나다. 심지어 숙소도 선배들과 함께 쓰기 때문에 24시간을 누군가와 함께 있어야 한다. 그렇게 몇달을 지내다가 혼자만의 시간을 가진적이 있었다. 별다른 일은 하지 않고 혼자 가만히 앉아 있는데, 평소에는 들리지도 않던 바람소리가 들렸다. 그렇게 한참 앉아 있었다. 꿀맛이었다.
지금은 항상 혼자 있어서 그런지 그 꿀같은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머리가 복잡해서 그럴지도 모르는 일이나 아무튼 항상 A라는 일을 하면서 B라는 일을 생각하면서 몸은 C라는 곳으로 가고 있는 식이다. 그래서 가끔은 나도 아무것도 안하고 가만히 있어보려고 한다. 아무것도 안하는 동시에 아무 생각도 안하고 있어보려고 한다. 하지만 잘 되지 않는다. 미묘하게 마음이 불편해 진다.
오늘도 억지로 마음의 안정을 찾으려고 책을 집어 들었는데,
<1983>,<동물농장>의 작가 조지오웰이 쓴 에세이집을 뒤적이다가 생각해볼만한 구절이 보여 적어 둔다.
"...자연을 찬탄 한다는 관념 자체는, 빙하나 사막이나 폭포 앞에서 종교적인 경외심을 느낀다는 것은, 우주의 힘에 비해 인간이 왜소하고 미약한 존재임을 느끼는 것과 관련이 깊다. 달이 아름다운건 우리가 그곳에 다다를 수 없기 때문이기도 하고, 바다가 장엄한 것은 우리가 그곳을 무사히 건넌다는 확신을 절대 할 수 없기 떄문이기도 하다. 심지어 꽃을 보는 즐거움도 그런 식의 신비감이 있기에 가능하다 할 수 있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자연에 대한 인간의 힘이 점점커져가고 있다. 원자탄을 쓰면 우리는 말 그대로 산을 옮길 수 있다. 심지어 극지방의 빙상을 녹이고 사하라 사막에 물을 댐으로써 지구의 기후를 변화시킬 수도 있다고 한다. 그렇다면 스윙 음악보다 새소리를 더 좋아하는 데에는, 온 지표면을 인공 태양등이 넘치는 '아우토반'망으로 덮어버리기보다 여기저기 야생지를 좀 남겨뒀으면 하고 바라는 데에는 어딘가 감상적이고 반계몽적인 구석이 있는 것 아닌가?
이런 질문을 할 수밖에 없는건, 인간이 물질세계는 탐사하면서 스스로에 대한 탐사는 하지 않으려 한다는 점 때문이다. 행락이란 이름으로 행해지고 있는 것 중 상당수는 의식을 파괴하려는 노력일 뿐이다. 인간이란 무엇인가, 인간에게 필요한 건 무엇인가, 인간이 자신을 가장 잘 표현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가, 하는 질문을 하기 시작한다면 인간으로서 잘 산다는 것이 단순히 일을 하지 않고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전등 아래서 녹음된 음악만 듣고 사는 능력을 갖게 되는 것만이 다가 아님을 알게 될 것이다. 인간에겐 온기가, 사회가, 여유가, 안락이, 안전이 필요하다. 또 고독도, 창조적인 작업도, 경이감도 필요하다. 그런걸 알게 되면 인간은, 언제나 어떤것이 자신을 인간적으로 만드는지 비인간적으로 만드는지의 기준을 적용하여 과학과 산업화의 산물을 선별적으로 이용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되면 지고의 행복이 긴장을 풀고, 휴식을 취하고, 포커를 하고, 술을 마시고, 사랑을 나누는 것을 한꺼번에 하는게 있지는 '않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아울러 삶이 점점 더 기계화되는 현실에서 민감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느끼는 본능적인 공포가, 옛것을 선호하는 감상적 취향에 불과한 게 아니라 십분 정당한 것임을 알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은 자기 삶에서 단순함의 너른 빈터를 충분히 남겨두어야만 인간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현대의 수많은 발명품들은 인간의 의식을 약화시키고, 호기심을 무디게 하며, 대체로 인간을 가축에 더 가까운 쪽으로 몰아가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쉽게 말해 '휴식'이라는 것이, 행복이라는 것이 꼭 음악을 듣고 책을 보고 붕가붕가를 하는데 있지는 않고, 가끔은 공터에서 아무것도 안하고 멍때릴수 있는 여유와 사색이 필요하다는 소리라고 받아 들였다.
사실은 그동안 다소 멍청할 정도로 스트레스 같은 건 받지 않는 인간이라고 생각했다. 혹은 남들은 옆에서 왜 이렇게 신경질적이냐고 했을런지도 모르겠지만, 적어도 나는 내 자신을 기본적으로 스트레스 프리라고 생각하고 있다.
하지만 어김없이 짜증이난 주말을 보낸 뒤 그 원인을 좀 생각해 봐야겠다는 생각을 했는데, 많은 부분은 '독신 생활 스트레스'가 큰 이유인것 같다. 생활을 하면서 자연스럽게 생기는 스트레스가 10이라면 누군가와 함께 살때는 그 스트레스를 3:7, 6:4정도로 적절히 나눌 수 있다. 예를 들어 '어이, 이것은 자네가 해결 좀...','그래? 그럼 자네는 변기를 좀 뚫어주지' 이런식으로 서로 어떤 문제를 공유 하기 때문에 공동체라는 의식 같은게 생긴다.
하지만 혼자 살때는 모든 문제를 혼자 해결해야한다. 특히 그 장소가 자기가 익숙한 장소가 아니고 게다가 이제껏 살던 동네와는 판이하게 다른 법칙이 적용되는 동네라면 그 스트레스는 배가 된다.
나에게는 '외국'에 살기. 그것도 '브라질'에서 살기가 그 극도의 스트레스를 주곤한다.
많은 사람들이 느리고 불편한 서비스와 비싼물가등을 브라질의 고질적인 문제로 꼽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그 나라 말을 하고 난 뒤에 보이는 문제들이다. 나의 대한민국 상식과 브라질 상식은 그 차이가 엄청나게 크므로 부동산이나 각종 고지서들에 뭐라고 쓰여있는지 꼼꼼하게 따져보지 않으면 금전적/감정적으로 일정정도 손해를 보면서 그 나라의 법칙을 배우게 된다. 그리고 그것은 그 나라 말을 배우는 속도와 비슷하게 점차 해결되어지거나 적응되어진다.
오늘은 이메일로 부동산과 메일을 주고 받다가 일이 생겼다. (도통 무슨 이야기인지 모르겠던 내용도 짜증을 내다보면 이해가 된다, 아무래도 짜증을 내야 집중이 되는 인간이 되어 버린건지도 모르겠다) 얼마전 전기세 명의를 바꾸라는 메일을 받았는데, 아직 포어가 서툰 나로써는 그게 전기세를 내라는건지 전기를 끊어버리겠다는 건지 몰라서 일단 부랴부랴 전기세를 내고 왔다. 하지만 어제 갑자기 명의 이전을 안해서 벌금을 내야할 수도 있다는 메일을 받고서야 그 메일이 명의이전을 해야한다는 메일인지 이해를 했다. 교포 친구에게 부탁해서 결국 도움을 받기로 해서 다행이지만, 사실 이런 일이 너무 비일비재하게 일어나다보니 어느 순간 '어리버리'했기때문에 생기는 비용을 항상 염두에 두고 있다. 하지만 문득, '외국어'를 이해하지 못해서 생기는 불필요한 비용이라는 생각이 머릿속을 스치면, 마음속에서 열불이 터진다.
결국 이 '외국 독신 생활 스트레스' 문제는 언어를 내스스로 잘 해내지 않으면 궁극적으로 해결되지 않을 문제다. 그래서 어떤 문제가 생기면 그것을 해결 해주기보다는 함께 도란도란 욕을 하며 이런 생활의 스트레스를 잘 나누어줄만한 친구들이 많으면 그만이라고 생각한다.
이렇게 혼자이기 떄문에 스트레스가 따블이 되는 상황은 몇년간의 외로운 업무환경에서도 비롯된다.
보통의 사무실은 이메일과 회의 같이 딱딱한 기록 이외에 대화와 눈치라는 미묘한 감정들이 적당이 얼버무려져 '커뮤니케이션'이라는 것이 된다. 그리고 그렇게 '미묘한 감정'이 대부분의 기억이 되고 전체의 방향이 되어 비교적 비슷한 방향으로 일을 하게 된다. 하지만 혼자서 무언가를 해결해 나가다보면, 모든것을 홀로 기억하고 저장하고 정확하게 전달 해야한다. 그리고 만약에 생길수 있는 오해도 혼자서 대비해야한다. 그리고 그런 시간이 오래되면 기필코 잘못된 아이디어가 중간에서 생겨나고 전체가 공유하는 방향은 사라진다. 그리고 또 다시 혼자가 되어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거창하게 이야기 한 것 같지만, 쉽게 이야기하면 나 이외에 아무도 내가 하고 있는 일을 이해하지 못하거나, 이해한다손 치더라도 도움을 받을 수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라 외로움이 극심하다라는 말이다. 이건 정말 방법이 없다. 있다고 하더라도 나 혼자 해낼 수 없는 방법이다.
만약 내가 하고 있는 프로젝트가 게임이라면 나혼자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뛰어 성적을 내는 개인전이 아니라, 모두가 함께 뛰어 동시에 결승점에 도착해야하는 단체전이다라는 생각으로 이제 나는 슬슬 걷기로 또 다시 다짐 함.
나도 내가 이런 말을 하게 될 줄은 몰랐는데, 요즘 아이돌 그룹들의 가사를 보면 끔찍하기 짝이 없다.
극도로 파편화된 단어들을 나열한다던가 뜻도 이해가지 않는 단어들을 이어 붙여 추임새를 만들어서 언어 자체의 의미보다는 하나의 소리의 형태로 '느낌'을 전달하려고 한다는 느낌을 많이 받는다.
예를 들어서 G-Dragon의 '크레용'이라는 노래의 가사를 듣고 있으면 대충 이런식이다.
누가 아니래 U know I beez that (누가 내가 그것을 비즈?하는것을 아니라고 하느냐) 오늘의 DJ 나는 철이 너는 미애 (예전의 유명한 혼성듀오같이 나는 오늘의 DJ를 할 것이다.) 아가씨 아가씨 난 순결한 지용씨 (나의 이름은 권지용입니다) 이리 와봐요 귀요미 네 남자친구는 지못미 (에헤 그러지 말고 니 남자친구를 버리고 이리와라) 넌 마치 닮았지 내 이상형 so give me some (내 이상형이랑 닮았으니 이리와서 좀 주세요?) 김태희와 김희선 oh my god 전지현 (유명 여자 연예인의 이름들)
뭘 하고 싶은지는 충분히 이해되는데 이정도 되면 해체주의 문학정도로 부를수도 있겠다.
많은 아이돌 가수들이 이런식의 해체주의 가사를 쓰고 있을때도 가끔 가사들이 머릿속에 오랫동안 맴도는 노래들이 있지만, 예전에는 그 빈도가 훨씬 높았다. 그래서 어떤 특수한 상황이 되면, 자연스럽게 그 노래가 떠오른다거나 하는 일이 많았다. 예를 들면, 광화문에 가면 이문세가 떠오른다거나, 군대를 가거나 서른살 생일에는 김광석이 떠오른다거나 하는 일 말이다.
오늘은 혼자서 밥을 맛있게 해먹고 베란다에 앉아서 멍하니 담배를 피웠다. 상파울루 시내를 내려다 보면서 연기를 깊게 들이 쉬고 내뿜었다. 그리고 인생이 책이라면 오늘 어떤 책의 단락이 끝났음을, 그리고 또 다른 단락이 이미 시작됐음을 느꼈다.어떻게 변화가 되는지는 아주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나 어렴풋이 느끼겠지만, 분명히 변했다.
그리고 바로 이 노래의 "한치 앞도 모두 몰라 다 안다면 재미없지 "라는 가사가 오늘 밤 내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고 있다.
동생이 추천 해 준 <피로사회>, ~하면 안된다로 인간을 규제하는 규율사회에서 ~해야한다로 인간을 해방한 듯 보이는 성과 사회가 주는 치명적인 우울감과 소외감을 철학적으로 엮어낸다. 다소 어려운 부분이 없지 않지만, 전체적인 내용을 파악하는 것은 아주 어렵지는 않다.
규율사회의 부정성은 광인과
범죄자를 낳는다. 반면 성과사회는 우울증 환자와 낙오자를 만들어 낸다.
아무것도 가능하지 않다는
우울한 개인의 한탄은 아무것도 불가능하지 않다고 믿는 사회에서만 가능한 것이다.
활동성이 첨예화되어 활동과잉으로
치달으면 이는 도리어 아무 저항 없이 모든 자극과 충동에 순종하는 과잉수동성으로 전도되고 만다는 것이 바로 활동성의 변증법이다. 그것은 자유대신 새로운 구속을 낳는다. 더 활동적일수록 더 자유로워질
거라는 믿음은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
니체가 말한 “중단하는 본능”이 없다면 행동은 안절부절못하는 과잉활동적 반응과 해소
작용으로 흩어져버릴 것이다. 순수한 활동성은 그저 이미 존재하는 것을 연장할 뿐이다. 진정 다른 것으로의 전환이 일어나려면 중단의 부정성이 필요한 것이다.
머뭇거림은 긍정적 태도는
아니지만, 행동이 노동의 수준으로 내려가는 것을 막는 데 필요 불가결한 요소이다.
“활동적인 사람들은 보통 고차적 활동을 하는 법이 없다. 이런
점에서 그들은 게으르다. 돌이 구르듯이 활동적인 사람들도 기계적인 어리석음에 걸맞게 굴러간다” 활동에는 다양한 종류가 있다. 기계처럼 어리석게 계속되는 활동은
중단되는 일이 거의 없다. 기계는 잠시 멈출 줄을 모른다. 컴퓨터는
엄청난 연산 능력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어리석다. 머뭇거리는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무언가를 할 수 있는 힘만
있고 하지 않을 힘은 없다면 우리는 치명적인 활동과잉 상태에 빠지고 말 것이다.
문제는 개인 사이의 경쟁
자체가 아니고 경쟁의 자기 관계적 성격이다. 그로 인해 경쟁은 절대적 경쟁으로 첨예화된다. 즉 성과주체는 자기 자신과 경쟁하면서 끝없이 자기를 뛰어 넘어야 한다는 강박,
자기 자신의 그림자를 추월해야 한다는 파괴적 강박 속에 빠지는 것이다. 자유를 가장한 이러한
자기 강요는 파국으로 끝날 뿐이다.
지나가던 사람이 한 인부에게 '지금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라고 묻자, 그는'벽돌을 쌓고 있습니다'라고 대답했다. 그리고나서 다른 인부에게 똑같은 질문을 하자, 그는 '집을 짓고 있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이 두 사람이 머리속에 그린 장면은 사뭇 다를 것이다.
벽돌을 쌓는다고 대답한 인부는 오늘 받을 임금, 그리고 그 돈으로 가족들과 나눌 따듯한 저녁식사를 그리며 열심히 벽돌을 쌓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집을 짓고 있는 인부는 자신이 만드는 집에서 생활할 가족들의 행복함을 생각했을 것이다.
무엇이 옳고 그르다라고 판단하기 어렵지만, 적어도 벽돌을 쌓는 힘든 노동의 시간을 두 사람은 조금 다르게 받아 들이고 있다.
약간은 다른 이야기겠지만, 몇 달간 콜롬비아 보고타에서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직업에는 귀천이 없다고 하지만 간혹 같은 장면으로 보고 조금 더 큰 그림을 보는 사람들, 혹은 그런 자질이 나에게 부족하다는 것을 느끼고 있다. 물론 디테일을 잡아나가는 것이 기본이 되어야 겠지만, 이 일을 왜하고 있는지 명확하게 알고 있지 않은 상태로 디테일만 잡아가는 것은 위험하다고 느끼게 되었다.